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苦行의 길 택한 金喬覺
성덕왕의 맏아들 金守忠설 유력
眞身 모신 고찰, 中國 민족 성지로
중국 안휘성 합비시(合肥市) 남쪽에 구화산(九華山:해발 1342m)이 있다. 구화산은 아미산 보타산 오대산과 함께 중국의 4대 불교 성산(聖山)의 하나로 꼽히는데 무려 80여개의 사찰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구화산을 성산으로 만든 인물이 김교각(金喬覺)이란 신라 왕자 출신 승려이다.
김교각은 `쌀 보내준 은혜에 보답함(酬惠米)\'이란 시에서 비단 옷 납의로 갈아입고/불법을 닦으려 바다 건너 구화산에 이르렀네/나 본래 왕자의 몸으로/수행의 길에서 오용지를 만남이여라고 자신이 신라의 왕자임을 스스로 밝혔다.
그는 서기 794년(신라 원성왕 10년) 99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이는 그가 696년(효소왕 5년)에 태어났음을 뜻한다. 그는 24세 때인 719년(성덕왕 18년) 당나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가 무엇 때문에 왕자의 신분을 버리고 중국으로 갔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중국의 사주전(謝澍田) 교수는 그가 성덕왕의 장자 김수충(金守忠)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삼국사기\' 성덕왕 13년(714)조는 왕자 김수충을 당에 보내 숙위케 하자 당 현종이 그에게 제택(第宅)과 비단옷을 내렸다고 전하고 있고, 성덕왕 16년조는 견당대감(遣唐大監) 김수충이 돌아와 문선왕(공자) 10철 72제자의 그림을 바치자 이를 대학(大學)에 안치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문선왕 10철 72제자 등은 모두 유교와 관련된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김교각이 과연 김수충인가는 의문이 있다.
신라서 겪은 정치경험
자유로운 참선 밑거름
이처럼 김교각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구화산에는 그에 관한 수많은 일화들이 전한다. 그는 도당(渡唐)할 때 신라의 삽살개를 가져왔다고 전하고 있는데, 평생 그의 수행을 도왔다는 삽살개는 상으로 만들어져 현재 구화산을 지키는 영물로 여겨지고 있다.
다른 하나가 낭랑탑(娘娘塔)으로서, 현재는 기단만 남아 있는데 신라 여인을 위해 세워졌다는 애틋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낭랑탑 기단 위에는 명안천이 있는데, 김교각의 어머니가 신라에서 구화산으로 찾아와 울음을 그치지 않아 눈을 상했는데 교각이 화성사 앞 우물에서 물을 길어 어머니의 눈을 씻기자 눈이 나았다 한다.
이 우물에 세운 보탑을 후세사람들이 명안천이라고 명명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성전(二聖殿)은 김교각의 외삼촌으로서 그를 데리러 왔다가 도리어 그에게 감화되어 승려가 된 소우(昭佑) 소보(昭保) 두 사람의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절인데 현재도 두 사람을 기리는 이성회가 매년 열린다.
이런 전설 외에 김교각이 고향으로 떠나는 자신의 동자에게 준 시는 그의 심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불문이 쓸쓸하여 집 생각 하더니/절방을 하직하고 구화산을 떠나는구나/난간에 기대어 죽마 타던 어린시절 그리워하던 너/금같은 불도의 땅도 너를 붙잡지 못하는구나/첨병곡의 달 구경도 마지막이며/자명구의 꽃놀이도 끝이 났구나/서운해 눈물 흘리지 말고 잘 가거라/노승은 안개와 노을을 벗하리라\'
사찰생활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떠나는 어린 동자를 떠나보내며 김교각은 자연스레 고향 산천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교각은 `안개와 노을을 벗\'하며 수행을 계속했다. 당시 불교계는 선종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으나 김교각이 경전을 읽고 참선을 계속하면서도 특정한 종파에 매달리지 않은 것은 신라에서 겪은 정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김교각을 지장보살로 만든 것은 그가 입적한 후에 벌어진 신비로운 일 때문이다. 99세 때 김교각은 주위의 모든 승려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입적했는데 사찰에서는 그의 육신을 돌항아리에 넣었다. 3년 후에 열어보니 그때까지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해서 사람들은 그를 지장의 화신이라 여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장보살은 석가의 위촉을 받아 그가 죽은 후 미래불인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의 무불(無佛)시대에 6도의 중생을 교화, 구제한다는 보살인데, 중생이 모두 제도한 후에 깨달음을 이룰 것이며, 지옥이 빌 때까지는 결코 성불하지 않으리라는 지장보살의 서원(誓願)을 김교각은 육신으로 실현한 셈이었다.
김교각 스님을 지장보살이라고 확신한 당시 사람들이 그의 육신에 금을 입히고 3층 석탑을 세웠는데 후인들이 그 위에 세운 사찰이 바로 육신보전(肉身寶殿)이다. 김교각의 진신(眞身)을 모신 이 고찰은 797년 지었으며, 청나라 때 중건되었는데, 중국 민중불교의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다.
백토와 쌀, 모닥불로 수행
99세 모든 것 버리고 입적
그가 신라 왕실을 버리고 중국으로 건너간 이유는 그 자신의 자각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신라왕실의 권력투쟁에 염증을 느낀 결과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는 현실의 유한한 가치보다 이상의 무한한 가치를 추구했다는 사실이다.
김교각은 식량과 의복이 부족할 때는 스스로 농사짓고 땔감을 해 날랐으며, 그래도 부족하자 백토와 쌀을 섞어 먹고, 모닥불만으로 한기를 이겼다고 전하고 있다. 이런 어려운 수행을 마다하지 않았기에 그의 육신이 썩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전쟁의 시대, 증오의 시대, 갈등의 시대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영원한 삶을 얻었던 김교각의 생애는 하찮은 것도 버리지 못하고 집착하는 우리들에게 다시금 인생의 의미를 생각게 해 준다.
이덕일 <한가람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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