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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장(金地藏), 석지장(釋地藏)
2003.07.12 13:57
김지장은 신라 성덕왕의 장자 김수충인가?
세상 사람들이 지장왕보살(地藏王菩薩), 김지장(金地藏), 석지장(釋地藏)이라고 부르고 있고, 열반 후 육신이 등신불이 되어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으며, 중국 안휘성 구화산 화성사 육신보전(中國 安徽省 九華山 化城寺 肉身寶殿)에 모셔져 있는 그는 누구일까? 그가 신라의 왕자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신라 어느 왕의 왕자라고는 전하여 지지 않았다.
이미 천년도 훨씬 넘은 먼 옛날의 일이기에, 그에 대한 기록은 극히 적고 단편적이라서 정확히 누구라고 단정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되나, 모든 기록과 사서(史書)를 참고하고 정황을 판단해 본다면, 신라시대 어느 왕의 아들일 것이다 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으리라 판단된다.
기록을 검토함에 있어서는, 국내에는 옛부터 전해오는 그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필자가 서기 1981년도에 우연히 얻은 동판(銅版)의 내용이 그에 관한 것이어서, 그 내용중 출생년도에 대하여 분석하고, 사서로는 삼국사기 신라본기(三國史記 新羅本紀)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그리고 화랑세기(花郞世紀)의 기록을 참고하였고, 요즈음 국내에서 출간된 김지장에 관한 각종 인쇄물을 참고하였으며, 중국학자의 논문을 주로 참고하였다. 신라국 왕자이고 김씨 근친(金氏近親)이며 24세에 출가하여 중국 구화산에서 99세까지 불도에 정진하다가 열반에 들었고, 그가 열반에 들 때 “산이 울리고 돌이 굴러 내렸으며 대지에 신광(神光)이 번쩍이고 뭇 새들이 구슬피 울었으며 법당의 서까래가 무너져 내렸고 큰돌이 소리없이 떨어졌으며, 화성사(化城寺)의 종은 아무리 쳐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고 하고 또 석함(石函)속에 육신을 넣고 뚜껑을 닫은 지 3년 후에 개옹(開甕)해보니 용모가 생전과 다름없었고, 근골(筋骨)을 건드리니 쇠사슬(金鎖)소리가 나서 불경에 있는 지장보살에 관한 내용과 같은 현상이므로, 사람들이 지장보살의 현신(現身)으로 여겨 육신보전탑을 세우고 그 안에 등신불(等身佛)로 모시게 되었으며, 그후 화성사가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는 화성사에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과 전설의 주인공.
그러나 현재, 그가 누구였는지는 아무도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의 불교계 및 학계에서는 중국측 학자의 주장을 아무 여과 없이 받아들여, 성덕왕 장자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러나 성덕왕 장자설은 아버지인 성덕왕이 8-9세미만 시에 아들이 출생해야 되는 생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중국측 학자의 주장에는 그것이 결정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그러면 정말 김지장은 어느 때 태어났으며 신라 어느 왕의 아들이며 그의 정확한 신분은 무엇일까?
중국측 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당 원화(唐 元和) 8년(A.D. 813년)에 쓰여졌다고 하는 구화산 화성사기에 ‘開元末年時有僧地藏 則 新羅國王子 金氏近屬 時年 九十九歲 貞元 十年夏 忽召徒衆告別’(개원말년(A.D. 741년)때 중 지장이 있었다. 그는 신라왕자이며 김씨 근속이었고 99세로 정원 10년(A.D.794년) 여름에 제자들과 이별을 고하고 홀연히 열반하였다)의 기록을 인용, 역산(逆算)하여 김지장은 당 무측천만세통천(唐 武則天萬歲通天) 원년(A.D.696년)에 출생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동판(銅版)의 기록을 보면 ‘新羅國王子 姓金 名喬覺 唐 貞觀二年 七月三十日生’(신라국 왕자이며 성은 김씨요 이름은 교각이다. 당 정관2년(A.D.628년) 7월 30일에 태어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출생년대에 있어 <화성사기>의 기록과 동판의 기록은 무려 68년의 차이가 나는데, 동판의 기록은 생일까지도 정확히 밝히고 있다.
어느 것이 옳은 기록인지 알 수 없으니 다만 두 기록을 비교하여 연구 해볼 수밖에 없다.
다만 김지장 또는 김교각은 신라의 왕자 신분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김지장이 오용지(吳用之)에게 써서 주었다는 ‘수혜미’(酬惠米)라는 시가 전해져 오는데 여기에도 그 자신이 왕자의 신분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신라의 왕자로되 어느 시대 어느 왕의 아들이며, 무슨 사유로 왕자의 신분을 벗어 던지고 출가하여 불법을 구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은 필자의 과제일 것이다.
☆김지장의 성덕왕 장자 김수충설의 진상은?
김지장이 신라의 왕자였다면 어느 왕의 아들이었을까를 밝힐 수 있다면 그가 과연 누구였을까를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우선 중국측 학자의 주장에 따라 그의 가계를 살펴보자. 그는 김지장 즉 김교각이 만세통천(萬歲通天) 원년(A.D.696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때는 신라 32대 효소왕(孝昭王) 5년에 해당되는 해이다. 효소왕은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의 맏아들 이홍(理洪)인데, <삼국사기>’신라본기’ 신문왕 7년 조에, ‘七年 春二月 元子生’(7년(A.D.687년)봄 2월에 맏아들이 태어났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효소왕은 서기 687년에 태어난 것을 알 수 있다.
또 신문왕 11년조에 ‘十一年 春 三月一日 封 王子 理洪 爲 太子’(11년(A.D.691)봄 3월 1일 왕자 이홍을 태자로 삼았다). 그리고 효소왕 원년(A.D.692년) 조에 ‘孝昭王立 諱理洪 神文王 太子’(효소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이홍이요. 신문왕의 태자이다). 또 성덕왕 원년(A.D.702년)조에 ‘聖德王立 諱興光 神文王 第二子 孝昭同母弟也, 孝昭王薨 無子 國人立之’(성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흥광이요 신문왕의 둘째아들이다. 효소왕의 동복동생이다. 효소왕이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는 기록을 검토해 볼 때 효소왕(孝昭王)은 아들이 없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면 성덕왕(聖德王)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은 있는가?
-서기 687년 2월 ; 효소왕 출생
-688년 ; 성덕왕 출생가정(신문왕 2자 흥광)
-689년 ; 2세 -690년 ; 3세
-691년 ; 4세 -692년 ; 5세
-693년 ; 6세 -694년 ; 7세
-695년 ; 8세
-696년 ; 김지장 출생 주장 년도
(성덕왕의 장자 ‘수충’가정시)
그러나 위의 표에서 보듯이 성덕왕은 아무리 빨라도 A.D.688년에야 태어날 수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서기696년에 성덕왕의 아들이 태어나야 하는데 8-9세 미만인 성덕왕이 자식을 낳았을 가능성은 불가능한 일로서 중국측 학자가 주장하는 성덕왕의 장자인 김수충(金守忠)일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따라서 김수충은 서기 696년보다는 그 이후 즉, 아버지인 성덕왕이 더 성장한 시기에 출생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역사기록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 성덕왕에게는 세명의 왕비가 있었다고 한다.
제 1 비인 성정왕후(成貞王后)
제 2 비인 엄정왕후(嚴貞王后, 또는 陪昭王后라고도 한다)
제 3 비인 소덕왕후(炤德王后)가 그들이다.
그런데 제 1비인 성정왕후는 성덕왕이 왕이 되기 전에 혼인을 하여 장자인 ‘수충’을 낳았으나 왕 15년에 폐출시켰고, 제 2비인 엄정왕후는 성덕왕 3년(A.D.704년) 5월에 승부령 소판(乘府令 蘇判)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으며, 2자인 중경(重慶)을 낳았고 왕 14년(A.D.715년)에 중경)을 태자로 봉했으나 왕 16年(A.D.717년)에 태자가 죽고 말았다. 제 3비인 소덕왕후는 성덕왕 19년(A.D.720년) 3월에 이찬 순원(順元)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으며, 성덕왕의 3자 승경(承慶, 34代 孝成王), 4자 헌영(憲英, 35代 景德王)그리고 이름미상의 5자인 왕자 1명 등 3명의 아들을 낳고 성덕왕 23년(A.D.724년) 12월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측 학자(사수전교수)는 <삼국사기>신라본기 성덕왕 13년(A.D.714년) 2월 조에 ‘遣王子 金守忠 入唐宿衛’(왕자 김수충을 당나라로 숙위로 보냈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하여 당나라로 갈 때의 나이가 18세 정도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였지만, 앞에서 살펴 본대로 당시 김수충의 나이는 15세도 안되었을 것이므로 김지장이 곧 김수충일 것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곤란한 것이고, 또 성덕왕 14년(A.D.715년) 12월 조에 ‘封王子 重慶爲太子’(왕자 중경을 태자로 삼았다) 또, 성덕왕 15년(A.D.716년) 3월 조에 ‘出 成貞王后 賜彩五百匹 田 二百結 租 一萬石 宅 一區 宅買 康申公舊居賜之’(성정왕후를 궁에서 내 보내는데 비단 500필, 밭200결 벼1만석 집 한 구역을 주었는데 집은 강신공의 옛 집을 사서 주었다.) 또 성덕왕 16년(A.D.717년) 6월 조에 ‘太子重慶卒 諡曰孝 ’(태자 중경이 죽었다. 시호는 효상이다). 그리고 9월 조에 ‘秋九月 入唐 大監 守忠 廻 獻 文宣王 十哲 七十二弟子圖 卽置於大學‘(가을 9월 당나라에 들어갔던 대감 김수충이 돌아왔는데 문선왕(공자)과 10철 72제자의 초상화를 바치매 즉시 대학에 비치하였다.) 또 성덕왕 23년(A.D.724년) 봄 조에 ‘二十三年 春, 立 王子 承慶 爲 太子’(23년 봄 왕자 승경을 태자로 삼았다.) 또 효성왕 원년 조에 ‘孝成王立 諱承慶 聖德王 弟二子 母 炤德王后’(효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경이요. 성덕왕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소덕왕후이다」등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김수충의 어머니인 성정왕후가 폐출 되었고 그에 따라 장자인 김수충이 왕위계승 서열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태자로 책봉받지 못했을 것이고, 신라 34대 효성왕 승경(承慶)은 실제 ‘수충’, 중경(重慶, 夭折)에 이어 셋째 아들인 데도 불구하고 둘째 아들이라고 기록된 것을 근거로 하여 김수충은 아예 성덕왕의 아들로서의 모든 지위를 박탈당한 것이고, 그리하여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마음으로 출가(出家)를 결심하게 되었을 것으로 주장하는데 이는 너무 심한 비약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김수충의 출생년도부터 빗나갔고, 셋째 아들 승경을 둘째 아들이라고 기록한 것은, 둘째 아들인 중경이 후손도 없이 요절한 관계로 셋째를 둘째라고 기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본 연구자에게도 김수충이 태자로 책봉되지 않은 것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다.
설령 성정왕후와 성덕왕과의 관계가 원만치 못했다 하더라도, 또 성정왕후가 성덕왕이 왕이 되기 전에 맞아들인 부인이었다 하더라도 남편이 왕이 되면 당연히 부인도 왕비에 봉해져야 하고 그의 아들도 왕자로 봉해지고 대개 장남의 경우, 태자로 봉해지는 것이 상례였음에도 수충은 당나라로 숙위가기 전에도 그랬고, 둘째 왕자인 중경을 태자로 봉했다가 요절한 뒤에도 수충은 태자로 봉해지지 못했고, 드디어 성덕왕은 새로이 소덕왕비를 맞아들여 그의 소생으로 하여금 태자로 봉했으니 그가 바로 승경(34代 孝成王)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미우니 그 자식도 미웠다는 것인가? 이해 못할 일이다.
☆김교각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이다.
동판(銅版)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가 김지장으로 알고 있는 신라의 왕자는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교각’이며 당 정관(貞觀) 2년(A.D. 628년) 7월30일에 출생하였다고 되어 있다. 당 정관 2년이라면 신라 진평왕 50년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진평왕의 가계는 어떤가를 알아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상대로 올라가 진흥왕 대에서부터 살펴보아야 이해하기가 쉬워진다. 그 가계를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김교각의 출생년도는 신라 26대 진평왕 50년(A.D.628년)에 해당되는 해이다. 따라서 진평왕은 이미 노쇠하였을 것으로 판단되고, <삼국사기>신라본기 ‘선덕여왕 원년’(A.D.632년) 조에 ‘王(眞平王)薨 無子 國人立德曼 上號 聖祖皇姑’(진평왕이 죽고 아들이 없으매 나라사람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칭호를 올려 성조 황고 라고 하였다.)하였으므로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었음이 확인되었고, 따라서 김교각이 진평왕의 왕자일 수는 없다.
그러면 신라 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의 아들일 가능성은 있는가? 태종무열왕은 신라 25대 진지왕(眞智王)의 손자(孫子)이다. 따라서 선덕여왕(善德女王),진덕여왕(眞德女王)과는 6촌간이 된다.
<삼국유사>기이 제1 태종 춘추공(春秋公) 조에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59세로 죽어 애공사(哀公寺) 동쪽에 장사지내고 비석을 세웠다는 기록을 참조하여, 삼국사기의 연표에 따라 역산(逆算)해보면 김춘추는 서기 603년에 태어나 서기 661년 6월에 죽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그의 비인 문명왕후(蘇判 舒玄의 막내딸이며 金庾信의 누이동생)와 혼인하게된 일화가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상)조에 기록되어 전해져 오고, 그때 낳은 첫아들이 후일에 신라 30대 문무왕이 되는 법민(法敏)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면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문명왕후(본명은 문희)가 서기 몇 년쯤 혼인하였을까?
그것은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대강의 윤곽을 알 수 있는데, <삼국유사> 기이 제1 태종 춘추공 조에 ‘公(春秋)知 庾信之意 遂幸之 自後 數數來往 庾信知其有娠 乃 之 曰 爾不告父母有娠何也 乃宣言 於國中欲焚其妹 一日 矣 善德王 遊幸南山 積薪於庭中 焚火烟起 王望之問 何烟 左右奏曰 殆 庾信之焚妹也 王問其故 曰 爲其妹 無夫有娠 王 曰 是誰所爲 時公 侍在前 顔色大變 王 曰 是汝所爲也 速往求之 公受命 馳馬 傳宣沮之 自後 現行 婚禮’(춘추공은 유신의 뜻을 알고 유신의 누이동생(문희:후일의 문명왕후)과 관계하고 이로부터 자주 왕래하였다. 유신은 그의 누이동생이 임신한 것을 알고 꾸짖었다.”너는 부모님도 모르게 아이를 배었으니 그게 무슨 해괴한 일이냐?” 그리고는 온나라 안에 말을 퍼뜨려 그의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인다고 하였다. 어느날 선덕여왕이 남산에 거동한 틈을 타서 유신은 마당 가운데에 나무를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연기가 일어나자 왕이 바라보고 “무슨 연기냐”고 물으니 좌우에서 아뢰기를 “유신이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이는 것인가 봅니다.”하였다. 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 누이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한 때문이라고 했다. 왕이 “그게 누구의 소행이냐.”하고 물었다.이때 춘추공은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빛이 몹시 변했다. 왕이 “그것은 너의 소행이로구나. 빨리가서 구해 주도록 하라”하였다.
출처 : http://www.koreatea.or.kr/news/0205/0205-1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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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왕자 김교각스님이 구화산에서 지장보살로 화한 이야기
osel27 답변채택률 63.0%
2003.07.12 13:58
신라 왕자 김교각(金喬覺. 696-794) 스님이 생전 중국에서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았음을 입증하는 \'금인\'이 최초로 공개됨으로써 스님의 실존 여부를 둘러싼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료가 전하는 김교각 스님의 형상을 본뜬 이 금인은 당나라 황제 숙종이757년(지덕 2년) 스님의 신앙세계를 높이 받들어 하사한 것으로, 당시 스님의 법력을 짐작케 한다는 평가이다.
당 숙종이 하사한 금인은 가로, 세로 각 12㎝ 정방형으로 무게는 7근반(4.5㎏)에 달하며 금과 옥으로 만들어졌다. 금인의 등쪽에는 사자를 에워싼 구룡이 조각돼 있으며 바닥 등에는 \'지장이성금인\'(地臧利成金印)이라는여섯자가 전서로 새겨져 있다.
특히 금인의 받침부에는 \'당 지덕 2년\'이라고 아로새겨져 있어 금인의 하사 시점이 김교각 스님의 생전(입적 37년 전)이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김교각 스님의 실존 및 금인 하사시점 여부는 지금까지 학계의 논란거리였다. 또 스님의 얼굴이 조각된 금인의 머리 부위에 뿔이 솟아 있어 중국 사료가 전하는 스님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당시 인물로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중국학자 비관경은 \'구화산 창건 화성사기(化城寺記)\'에서 \"머리에 뼈가 불룩 솟아났다\"고 스님을 묘사한 바 있다. 김교각 스님은 중국의 4대 명산 가운데 하나인 구화산에서 지장신앙을 일으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696년 신라 성덕왕의 왕자로 태어나 스물 네 살에 출가,중국 구화산으로 건너간 뒤 초인적 고행과 법력으로 사람들을 교화했다고 사료는 전한다. 구화산에는 현재 99개의 사찰이 들어서 있으며 스님의 등신불이 모셔져 있다, 특히 스님을 추앙하고자 세계 최대 규모의 구리 지장보살상(높이 155m)이 건립중이며, 중국의 사찰마다 지장전에 스님의 상을 모시고 있다. 자비의 부처인 지장보살은 해탈의 경지에 도달했으나 석가의 위촉을 받아 그가 죽은 뒤 미래불인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 무불의 시대에 육도의 중생을교화, 구제하기 위해 이를 포기한 보살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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