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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천사 이야기
  일광  2022-11-02 06:19:49, 조회 : 540, 추천 : 17

복천사 이야기

1. 복천사 역사

세 개의 강물이 만나 하나의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지형이라 그 이름이 삼랑진(三浪津)이다. 일찍이 춘원 이광수가 소설 <무정>을 통하여 낙동강 수해현장에서 의연금을 모으고 자선음악회를 열어 구호활동을 전개하는데 그 소설의 무대가 바로 삼랑진이다. 대중가요 가운데 <이별의 삼랑진 역>를 비릇하여 3개의 대중가요가 삼랑진을 노래하고 있다. 지금은 딸기 시배지(始培地)로 유명하지만 1992년의 삼랑진은 봄이 되면 복사꽃이 만개한 무릉도원이었다. 삼랑진역에는 <삼랑진 관광명소>라 하여 안내 간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유명한 사찰로는 만어사와 부은암과 복천사(福泉寺). 이렇게 3개의 사찰이 대표사찰로 표기되어 있었다.
조월호스님이 쓴 복천사 사적기(寺蹟記)에 보면, 삼랑진의 팔경(八景)가운데 하나에 들어가는 매봉산(鷹峰山응봉산)은 매가 날개를 펴고 앉아 있는 모습과 흡사하여 이름을 매봉산이라 했다. 우리말로 뫼봉산이라 하며, 복천사는 그 새의 날개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복천사는 샘물이 맑고 차며 수질이 좋아 인간을 복되게 하고 이 도량에서 기도정진하면 복이 샘처럼 솟아난다하여 복천사라 이름하고 참새미(참샘)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복천사는 조선중엽에 조그마한 암자로 창건되었다가 화재로 인하여 전소되고 1920년 9월 9일 만선화상(萬宣和尙)에 의하여 사찰이 중창되었다. 그 후 여러 스님들이 사세를 보완하고 중건중수를 하다가 1982년 여환선사(如幻禪師)가 주석하면서 극락보전, 산신각, 요사채를 지으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복천사는 일제시대부터 재가불자(在家佛子)들에 의하여 칠성계(七星稧)모임을 갖고 신도회를 결성하였으며 지금도 그 전통을 이어 칠성계 모임을 하고 있다. 과거에는 음력 3월 3일이면 낙동강 강변에 나아가 나라의 안녕과 국민의 평안을 기원하는 국태민안國泰民安과 비, 바람이 순조로와 오곡풍년이 드는 우순풍조雨順風調를 기원하는 용왕재龍王齋 행사를 성대하게 하였는데 삼랑진의 대표적인 문화축제였다. 그 날은 인근의 사찰에서도 함께 강변에 나와 용왕재를 올렸는데 사람이 모이는 곳에 상인들이 먹거리는 가지고 와서  엿, 쑥떡, 단술, 국수등 많은 먹거리를 팔고 다양한 볼거리가 있었다. 복천사는 지금도 옛 전통을 이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법교화하고 있다.

2. 중창주 여환큰스님
역대 복천사에 주석한 주지스님들을 나열하면 만선스님으로부터 시작하여 박성봉스님, 안경산스님, 김선일스님, 조월호스님, 덕진당 여환(如幻)큰스님이 역대 복천사 주지를 엮임 하셨다. 여환큰스님(1924-2001)은 황해도 재령군 재령읍 석정리 21번지가 고향이다. 아버지는 김창여(金昌汝)이고 어머니는 곽부우(郭缶瑀)이며 2남 2녀 중에 막내로 태어났다. 그리고 속명은 김재업(金在業)이다. 그때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통치하던 일제 강점기, 일본어를 강제로 배우라고 하던 시절이었다. 스님은 일본어를 배우고 싶었다. 일어를 배워야 사회 진출이 용이하고 생활이 보장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주 엄격하셔서 일본어 배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철천지 원수같은 일본인의 글을 배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들과 아버지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었다. 어느날 아버지가 장날에 소를 팔고 그 돈을 숨겨 두었는데, 숨겨 둔 돈을 몰래 꺼내어 그 돈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 가서 선진문화를 보고 듣고 배우고 싶었다.  일본 도쿄 어느 하숙집에 방을 얻어 놓고 생활을 했다. 하숙집에는 또래의 딸이 있었는데 스님의 근면 성실한 모습을 보고 무척 좋아 했다고 한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스님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화를 내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들이 무탈하게 돌아온 것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일본 하숙집 주인의 딸이 현해탄을 건너 황해도 재령까지 찾아왔다. 스님은 매우 놀랐다고 했다. 특히 아버지가 알면 대노 하실 것 같아서 안절부절하였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설득을 시켜서 그 여성을 일본으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한다.
한국전쟁, 6.25가 터지자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면서 남한으로 내려왔다. 강화도 보문사에서 삭발염의하여 출가하게 되었으며, 범어사로 내려와서 지효큰스님을 뵙고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스님은 눈물이 많으셨다. 이산가족의 슬픔이 가슴 한 켠에 있어서일까? TV드라마에 슬픈 장면이 나오면 여지없이 손수건을 꺼내어 흐르는 눈물을 닦으셨다. 스님의 행화도량은 강화 보문사. 부산 범어사, 서울 봉은사와, 도봉산 천축사, 정릉 삼봉사, 불국사와 석굴암, 지리산 연곡사와 칠불사 , 울산 성불사, 사천 다솔사, 마지막 창건 사찰이 부산 남부민동 부산 대법사와 삼랑진 복천사에서 주석하시다가 열반 하셨다.  
스님은 공부하고 수행하는 스님을 좋아 했다. 공부하는 사람을 보면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고 존중하고 우대하였다. 스님은 소식(小食)을 하셨다. 절대 포만감 있게 드시지 않았다. 그것은 토굴 생활과 단독수행에 전념하면서 단식을 하였다. 그때 위장이 고장이 나서 평생을 소식을 하셨다. 스님은 일회용 커피나 일회용 음료수도 거의 드시지 않았다. 인스턴트 즉 가공식품은 되도록 멀리 하셨다. 스님은 특히 아끼고 절약하는 마음이 굉장했다. 길을 가다가 쓰레기통에 멀쩡한 수건이 있으면 가지고 와서 청결하게 빨아서 사용을 하는 분이셨다.
스님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넘어올 때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한국전쟁의 한 가운데 있으면서 전쟁의 참상을 뼈속까지 느낀 것이다. 밤에 잠을 자면 악몽에 시달렸다. 포탄이 떨어지고, 시체가 길거리에 널부러져 있고, 부모 잃은 아이는 목놓아 울고, 이런 여러 가지 트라우마가 꿈속에서 악몽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스님은 밤마다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은사이신 지효선사께서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일심정성으로 부르면 반드시 가피를 입을 것이라고 일러 주셨다.

觀世音菩薩 一心稱名 觀世音菩薩 卽時觀其音聲 皆得解脫
관세음보살 일심칭명 관세음보살 즉시관기음성 개득해탈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일심으로 부르면
관세음보살께서 그 음성을 관찰하시고
소원을 이루게 해 주신다.  

법화경에 나오는 부처님 말씀이다. 스님은 악몽을 극복하고자 일심정성으로 관세음보살님께, 3.7일 기도를 여러차례 하였다. 그래서일까 악몽이 사라졌다. 그 후 스님이 거처하는 수행도량의 법당은 항상 주불이 관세음보살이셨다. 부산 대법사도 초기의 법당은 <관음전>이었다. 그리고 초하루 법회가 아니고 스님은 음력 24일 관음재일 법회를 하셨다. 또 신기한 것은 스님의 열반일도 24일 관음재일이다. 스님은 말년에 밀양의 석정암(石井庵) 토굴에 계셨다. 토굴에는 당신이 늘 예불 올리는 관세음보살님을 원불로 모시고 살았다.  
스님은 선사(禪師)이셨다. 은사이신 지효큰스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올 곧게 수행정진 하려고 노력하셨다. 스님의 화두는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이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 가는가? 하는 것이 스님의 화두였다. 스님께서 1967년 서울 도봉산 천축사 주지 할 무렵이었다. 그때 천축사는 무문관(無門關)이 있었는데 6년을 결사하는 스님이 5분 계셨다. 관응스님, 제선스님, 현구스님, 지효스님, 경산스님인데 대한불교조계종을 대표하는 고승들이었다. 무문관이란 들어가는 문은 있어도 나오는 문이 없는 곳이 무문관이다. 한번 들어가면 깨달아야 나올 수 있는 문이다. 즉 사관(死關)이다. 죽어서 나오는 문이란 뜻이다. 스님은 최고의 고승을 모시고 주지소임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니 스님 자신이 얼마나 명료하고 투철하지 않았겠는가? 나중에 정릉 삼봉사에 상좌 운수스님이 주지로 있을 때, 스님이 잠깐 머물고 있었다. 그때 삼봉사에는 절 마당에 너럭 바위가 있었는데 스님은 한번 앉으면 공양시간을 제외하고 절구통수좌처럼 밤 낮 없이 꿈쩍 않고 앉아 있었다. 오르지 화두 일념에 몰입하는 것이다.
스님은 생전에 사찰을 두 개 창건 하셨다. 부산의 대법사와 삼랑진 복천사이다. 대법사는 사찰을 창건하신 것이고, 복천사는 본래 있던 절을 크게 중창한 것이다. 1982년 복천암을 복천사로 개명하고 사찰의 면모를 일신시켜 오늘의 복천사를 있게 한 것이다.
스님은 세납 78세의 일기로 열반 하셨다. 상좌는 20여명을 두었는데, 맡상좌 통광通光스님으로 시작하여
선교善巧스님, 무비無比스님, 무륜無倫스님, 선행善行스님, 선근善根스님, 선혜善慧스님, 선명善明스님, 선용善容스님, 무상無常스님, 선도善道스님, 선경善境스님, 선공善空스님, 정명定明스님, 운수雲水스님, 청운靑雲스님, 선일善日스님, 법광法光스님, 처광處光스님, 일광日光스님, 명광明光스님, 선광善光스님, 무탈無脫스님, 보각普覺스님이다. 이미 환속하거나 입적하신 분들이 많다. 지금 수행정진 하고 있는 스님은 6명 남짓하다.
스님께서 열반을 목전에 두고 임종게를 물으니, 다른 말씀 없으시고 “다른 생각하지 말라 오르지 자신의 마음을 항복 받으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2001년 음 8월 24일 관음재일에 조용히 입적 하셨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그때가 추석을 앞두고 있었다. 큰 사형 통광스님이 “큰스님! 내일 모레가 추석입니다 추석 전후에 열반하시면 일이 매우 어렵습니다. 추석을 넘기고 입적하십시요”라고 했더니 10일이 지난후에 열반하신 것이다. 해마다 음력 8월 24일이면 여환대선사를 위한 추모다례를 대법사에서 모신다. 추모다례에 <일연스님>의 마지막 열반 시를 인용하여 읊조린다.

즐겁던 한시절
자취없이 가 버리고
시름에 묻힌 몸이
덧 없이 늙었으랴
한끼밥 짓는 동안
더 기다려 무엇하리
세상사 꿈인줄
내인제 알았노라  

나의 은사이신 여환큰스님은 동산대종사 석영첩(東山大宗師 錫影帖)을 세상에 유통 시켰는데, 편집은 원두스님이 하였고, 유포는 여환스님이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석영첩은 동산 큰스님의 앨범(사진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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